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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위대한 우리역사 - 왜곡 된 우리역사 바로 세우기



일본인은 한국인의 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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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2월, 아키히토明仁 日王이 갑자기 "내 몸 속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라고 하여 자신의 혈통에 관하여 입을 엶으로서 한일간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당시 2002 韓日월드컵을 앞두고 고무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역할도 해낸바 있다. 일본의 2000년 사직의 왕통을 이어오며 가장 최고자리에 있는 왕(天皇)의 위치에서 그런 파격적인 발언이 행하여한 일 양국민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통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일본왕실은 일본의 고대사, 특히 고대국가 성립시의 왕실의 유래와 인물 왕래에 관해서는 거의 극비에 부칠 정도로 일체 함구, 학자들의 학문적 접촉조차도 금기시하고 꺼리는 극히 예민한 문제로서, 궁내청 내부에서도 쉬쉬하며 보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왕가를 보위하는 우익정계나 우익단체등의 압박에 의해, 사회나 언론에서 日王家의 혈통뿌리를 논하는 것은 아직도 금기시 되고 있다. 하지만 '피는 못속인다.'는 말처럼 최근 일본 역사의 실체가 현대과학과 수많은 발굴 유적으로 적나라하게 밝혀지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과학전문지「디스커버《지 1998년 6월호에서「일본인의 뿌리《라는 논문을 통해, '현재 일본인은 유전학적으로나 골상학적으로나 한국 이민족들의 후예임이 분명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는 일본인의 기원을 한국인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본 건국의 뿌리는 바로 우리 한민족이다. 일본에는 '단군조선' 말기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일대 변화를 가져왔던 '야요이(彌生)문화'가 있다. 이것이 바로 단군조선 말기에 한민족이 동쪽으로 대이동을 하여 일본에까지 가서 정착하는 단군조선의 역사와 부합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밝힘에 있어서, 즉 '한,일 관계사'에서 그 기원은 일찊이 '단군조선' 말기의 민족의 대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단군조선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단군세기에 의하면 36세 단군 매륵 38년(서기전 667)에 협야후를 보내 일본열도를 평정케 하였는데, 이가 바로 일본 천황가의 뿌리인 초대 신무(神武)천황임이 밝혀지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신무천황은 일본개국시조인 니니기의 증손자로 나와 있다.일본열도는 대부분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이룩되어 왔는데 그 사람들의 대부분은 단군조선인들을 비롯하여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계라는 것은 이미 밝혀져 왔고, 또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단군조선 말기의 영향을 받은 야요이문화는 특히 한반도 남부 지방 사람들이 일본 규슈지방으로 이주하여 형성한 것이다. 이들 청동기는 일본열도에 이주한 한민족이 만든 것이 분명함은 한국과 일본열도 두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극명하게 그 관계를 밝혀주고 있다. 일본 북규슈 사가(佐賀)현에는 단군조선 말기의 영향을 받은 야요이시대 유구지가 있다. 야요이문화는 단군조선으로부터 가까운 거리에 있던 서북규슈지방에서 시작되어 그 말기에는 훗카이도 일부를 제외한 일본열도 전지역에 확산되었다. 야요이문화의 연대는 그 발상지인 규슈지방의 경우 서기전 3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東京대학교 사사야마(笹山晴) 교수의 저서《일본고대사 연구》에 보면, '야요이문화는 일본에서 자생적으로 발전된 것이 아니라 해외에서 도래한 것이 분명하다'고 했는데 그는 한국에서 도래한 것이라고 밝히지는 않았으나 '해외'라는 것은 곧 '한국'을 암시하는 것이 분명하며, 일본학자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1987년 발행된 동경대학교 인류학 잡지의 영문판《고대일본 이주자 수 추정》이란 하나하라(埴原和郎) 인류학자의 주장을 보면, '일본인의 골상과 얼굴, 모습 등을 토대로 당시의 도래인의 수를 컴퓨터로 계산한 결과 규슈지방은 도래인들이 거의 전부다. 따라서 야요이시대부터 나라시대에 이르는 약 1천년 동안 대륙으로부터 일본에 건너 온 사람이 약 1백만 명이다'라는 추정통계 보고서를 발표하여 대량으로 이주한 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나라시대는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문화 말기를 말하는 것이다.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와 삼한 등에 이어, 가야인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보다 앞서 대마도를 거쳐 규슈로 대거 이주, 먼저 온 이주세력을 흡수한 후 규슈 전역을 장악, 고대 일본 국가형성의 주역이 되었다. 일본이 그들의 일왕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고분들을 비롯한 당시 지배자들의 묘제는 3∼4세기에 걸쳐 성행했던 '가야고분'의 형태이며 5세기 중엽부터는 백제 전기의 석실분이 나타난다. 일본 일왕 즉위식에서 전달되는 일왕가의 삼종신기(三種神器)라는 이른바 동경(銅鏡), 동검(銅劍), 곡옥(曲玉) 역시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에 의심을 하는 한,일학자는 없다. 이 세가지는 가야의 고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대마도와 북규슈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오키노시마는 고대유물의 정창원(正倉院)으로서, 출토된 유물이 대부분 '가야계'가 틀림없으나 일본 사학자들이나 궁내청은 이에 대해 함구하고 있으며 무더기로 출토된 국보급 유물들에 대해 일본 궁내청은 오키노시마에 외부인의 출입은 물론 접근조차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은 고대 유적지 발굴 특히 일왕가와 연관된 유적조사는 금기로 하고 있다. 출토물들이 1만여점이 넘는데 전부 비밀에 부치고 있다.

왜(倭)와 일본(日本)이라는 국명은 언제 생긴 것이고, 이들 나라는 누가 중심이 돼 세운 것일까? 왜라는 국명은 15대 응신(應神)일왕 때, 일본이라는 국명은 38대 천지(天智)일왕 때 생긴 것으로 왜(倭)는 가야인들이, 일본은 백제인들이 중심이 돼 세운 것이다. 그러나 가야는 그간 한국사에서 가야사가 많이 누락된 채 엮어져 왔다. 최근 김해지방 고분에서 가야 유물을 발굴하는 등 고고학적인 성과에 의해 그 공백이 급속히 메워져 가고는 있지 만 옛 문헌으로는 단지 삼국사기 에 그 일부분과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짤막한 내용만이 소개되어 있다.

가야는 서기 42년에 김해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에 의해 건국되어 520년간 존속하다가 서기 562년 신라에 병합되기 전 까지 고구려, 백제, 신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4국시대를 이루어 왔을 뿐만 아니라, 일찊이 철기문화를 꽃피우며 김해만을 중심으로 해상왕국을 건설하여 일본에 진출해 일본왕실의 기원이 되는 등 동북아 문화의 젖줄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 '가야사'는 일본왕실의 기원이라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왜곡, 말살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어용학자들을 내세워 일본 일왕가의 본관 감추기, 즉 일본의 기원인 단군조선을 비롯 '가야세력과 백제 망명정권이 일본 일왕가를 이루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수많은 고문서를 불태우는 등 우리 역사를 철저히 왜곡, 말살하였다. 일제는 1915년 6월 29일 치안상의 이유를 내세워 총독부 극비지령인 경무령을 발동하여 가야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족보 발행을 금지했고, '가야사'를 보존한 김해김씨문중을 약탈했다.

가야인들이 낙동강 유역의 비옥한 땅을 두고 일본 규슈지방으로 집단 이주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야지방과 일본열도, 특히 규슈와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고, 당시 일본열도는 인구가 적은 미개척지였기 때문에 개척 의욕이 강한 가야인들로서는 개척의 대상이 되었고, 문물이 발달한 가야인들은 성품이 온화하여 투쟁을 싫어해 백제와 신라의 크고 작은 협공을 수없이 받게되자 항쟁하는 것보다 차라리 신천지 개척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된 이유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993년 4월에 고려대에서 《역사적 뿌리 탐구의 여정》의 저자인 일본인 사학자 다카모도 마사도시(高本政俊; 1928∼)가 초청돼 「일본 속의 가야문화 ─ 일본 사람에게서 한�응構煮六潁� 듣는다《라는 강연회가 개최된 적이 있다. 다카모도 씨의 '고본(高本)'이란 성은 고구려의 후손으로서의 고(高)자와 일본에 건너온 것을 의미하는 본(本)자를 따서 만든 성씨라고 밝혔다. 그는 또 일본 각처의 지명, 신사와 절의 이름, 인명 등을 열거하면서 많은 한국인이 수차례 걸쳐 집단으로 일본에 건너와서 일본민족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일본의 고대 왕조와 깊은 인연을 가졌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고대일본사는 한민족의 이민사를 크게 넘지 않는다. 한마디로 한민족사의 연장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네 단계에 걸쳐 한민족의 일본열도로의 이주. 개척물결이 계속 밀어닥쳤는데, 제1단계는 고조선말기 고조선족이 집단적으로 이주하여 청동기.농경문화를 이식 전파함으로써 일본열도에 일대 변혁을 가져다 준 야요이문화(서기전 3세기-3세기)시기이다. 제2단계는 고분(古墳)문화(4세기-7세기)초기에 일본 최초의 통일왕조인 야마토(大和) 왜(倭) 정권이 기내(畿內)지방에 들어서면서 4-5세기에 걸쳐 대집단이 도일하였다.(야마토 왕조도 부여, 백제계 한민족이 건설). 3단계는 6세기 중반부터 7세기 초에 고도의 문화 기술집단이 건너가 고대 일본문화의 정수라 일컫는 아스까(飛鳥)문화 건설의 주역이 되었고, 4단계는 7세기 후반 백제.고구려 망국의 망명자 집단이 대거 일본에 건너갔다.

결록적으로 일본에 가보면 지금도 상당히 많은 한국문화의 뿌리가 그들의 생활속에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실감나게 볼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일본문화인 신도(神道), 신사(神社)문화도 기실은 한민족이 가져간 신선도의 소도(蘇塗)제사문화에 지나지 않는다. 한민족의 신선도를 그대로 가져가 다신신앙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이와같이 한국은 일본 민족문화 전반에 걸쳐 뿌리되는 나라이고, 전 역사를 통해서 은인, 스승의 나라였다는 사실은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는 역사의 진실 그 자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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