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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달나무숲 - 강원도


강릉 단오제와 대관령 국사성황당과 국사여성황당



답사 : 단기4346(서기2013)년 6월


몇년 전 부터 강릉단오제를 다녀오려고 계획한 일이 이제사 그 뜻을 이루게 되어 가슴 설렌다.
우선 강릉단오제를 제대로 답사를 하려면 대관령국사성황당 부터 답사를 해야 한다고 하니
대관령 부터 목적지로 정하고 길을 나선다.

부산에서 강릉까지는 제법 먼 길이지만, 예전엔 일년에 서너번 왕래한 익숙한 길이라
추억을 더듬어 가다 보니 주마등처럼 지난다는 말이 실감난다.
그 땐 참 고된 길이었는데, 그 사이 길도 좋아졌고 무엇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는 내 마음이 달라져서인지 가는 길이 가뿐하면서도 무척 짧게 느껴진다.

강릉단오제에 대해 사전 조사한 부분이 있어 함께 기재하여 이해를 돕고자 한다.
한반도 부족국가 역사를 기록한 중국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동예에서는 해마다 10월에 신께 제사하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데 이를 무천이라고 한다’고 돼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 최초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이어 <고려사>에 ‘935년 강릉 사람 왕순식이 왕건(태조)을 도와 신검을 토벌하러 가는 길에 대관령에서 산신께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나온다.
대관령 산신제를 지낸 첫 기록으로, 지금 ‘천 년 단오’라고 말하는 근거가 된다.

조선시대에는 추강 남효온(1454~1492년)이 쓴 문집에 ‘영동에서는 매년 3, 4, 5월 중에 날을 받아 무당들이 산신을 맞아 신에게 제사한다.
부자들은 제물을 말바리에 싣고, 가난한 사람은 이고 지고 대관령에 올라가 제사를 차리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홍길동전>의 작가로 유명한 허균(1569~1618)의 <성소부부고>란 책에도 강릉에 갔다가 직접 보고 들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곡식의 성장과 결실 기원한 공동체 행사

10월 무천은 추수감사제의 성격이고, 5월 단오는 곡식의 성장과 결실을 기원하는 파종축제의 성격이 짙다. 따라서 강릉단오제의 기원은 ‘마을의 안녕과 풍농·풍어·풍림’을 신에게 기도드리던 것으로 보인다. 즉 각 마을 주민의 건강과 질병퇴치, 1년 농사의 풍년, 풍성한 고기잡이와 가축번식, 수해와 관련되는 산림의 풍성함, 대관령 산행길의 안전 등을 기원한 것이다.

단오절에는 여러 풍속을 즐겼다. 여자들은 창포물로 머리를 감고 몸에 이롭다 하여 창포 삶은 물도 먹었다. 단오장이라 하여 창포잎의 이슬을 받아 화장하고 창포물로 세수를 하는 동시에 목욕재계도 했다. 또 창포가 무성한 못가나 물가에 가서 물맞이하는 풍습도 있었다. 크게 자란 고목거수의 옆가지에 그네를 매어 남녀노소가 즐겼으며, 남자들은 씨름을 겨뤘다. 그 외에도 가면극, 민요, 무속제 등 명실공히 종합예술축제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올해 강릉단오제는 6월 9~16일까지 강릉 남대천 일원과 대관령 국사성황당, 산신각 등지에서 열린다. 매년 100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몰리는 명실상부 한국 최고 최대 축제다.

강릉단오제는 단오 한 달 전인 음력 4월 5일 ‘신주(神酒)빚기’로부터 시작된다. 술은 신에게 바치는 가장 중요한 제물이다.
단오제례에 쓸 술을 만드는 일을 ‘신주빚기’라 한다. 강릉의 옛 관청이었던 칠사당(七事堂)에서 강릉시장이 내린 쌀과 누룩으로 신주를 담근다.
신주가 잘 익어야 단오제를 무사히 치르고 국사성황신과 국사여성황신이 강릉시민들에게 풍요와 안녕을 내려줄 것이라고 믿는다.

‘대관령산신제’와 ‘국사성황제’는 음력 4월 보름날 올려진다. 김유신 장군을 산신으로 모신 산신각에서 ‘대관령산신제’가 올려지고, 범일국사를 모신 국사성황사에서 ‘국사성황제’를 지낸다. 성황제가 끝나고 신목잡이가 신목(神木)을 베면 사람들은 신목에 청홍색의 예단을 걸어 국사성황의 행차를 준비한다. 신목은 단풍나무만 쓴다.

국사성황 행차는 대관령 아흔아홉 굽이를 내려와 구산에서 ‘구산서낭제’를 받는다. 구산을 떠난 국사성황 행차는 고향인 학산에 이르러 ‘학산서낭제’를 거친다.
학산은 국사성황신인 범일국사의 고향이다. 학산 서낭제 이후 강릉 시내에 돌아온 국사성황 행차는 국사여성황사에서 ‘봉안제’로 받는다.

유네스코, “인류에 이런 축제 남은 건 기적”

국사성황 내외를 강릉단오제 가설 굿당으로 모셔가는 ‘영신제(迎神祭)’는 음력 5월 3일 저녁에 이루어진다. 대관령국사여성황신에서 ‘영신제’를 마친 국사성황 행차는 ‘정씨가의 제례’를 받고 ‘영신행차’를 맞이해 남대천 제당으로 향한다. 음력 5월 4일부터 7일까지는 아침마다 ‘조전제(朝奠祭)’가 열린다.
이 유교적 제의가 끝나면 밤늦게까지 단오굿이 뒤따른다. 강릉단오제의 마무리인 ‘송신제(송신제)’는 음력 5월 7일 저녁에 올려진다.
이어 다음날인 5월 8일에 축제의 피날레를 장식한다.

세계무형유산 목록으로 선정된 강릉단오제를 본 유네스코위원들은 심사평에 ‘인류에게 이런 축제가 남아 있다는 것은 기적이다’라고 적고 있다.
바로 인류 기적의 축제가 한국에서, 그것도 강릉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대관령 국사성황당

드디어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던 곳을
이렇게 마주할 수 있다니 감개무량하다.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 참으로 기대하는
마음이 크다.

국사성황당

주말이라 그런지 등산객들이 많다.
등산객들을 태우고 온 고속버스 덕에
주차를 못해 한참을 기다리다가
겨우 주차를 하고 국사당 쪽으로
향하는 산길을 걷고 있자니 각양각색의
산야초들이 파릇파릇 자라고 있다.

국사당을 들어서니 굿하는 소리도 들리고
제법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모습이다.
그런데 그리 크지않은 개 한마리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꼬리를 흔들며
우리를 마중나와 준다.


성황당

개가 참 신기하게도 성황당 근처까지만 같이하더니 어느사이 또 입구로 돌아간다.
그 놈 참....!!!

성황당 쪽으로 눈을 돌리니 함박꽃이
깨끗한 자태를 뽑내며 피어있다.
성황당과 함박꽃 봉우리 두 송이가
참 잘 어울리는 듯 하다.
단오제 기간이라 그런지 국사성황당
이곳저곳에 굿판이 한창이다.

위 자료에서도 어필하였지만, 강릉단오제는
단오 한 달 전인 음력 4월 5일에 단오제 때
쓸 신에게 바칠 술 부터 빚기 시작하는데,
이것을 신주빚기라 한다. 신주는 강릉의
옛 관청이었던 칠사당(七事堂)에서
강릉시장이 내린 쌀과 누룩으로 신주를 담근다.
신주가 잘 익어야 단오제를 무사히 치르고
국사성황신과 국사여성황신이 강릉시민들에게
풍요와 안녕을 내려줄 것이라고 믿는다.
이 날 음력 4월 보름날 대관령산신제와
국사성황제가 올려진다.
김유신 장군을 산신으로 모신 산신각에서
대관령산신제가 올려지고, 범일국사를 모신
국사성황사에서 국사성황제를 지낸다.
성황제가 끝나고 신목잡이가 신목(神木)을
베면 사람들은 신목에 청홍색의 예단을 걸어
국사성황의 행차를 준비하면서 강릉단오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산신당

성황당 옆을 조금 지나면 산신당이 있다.
우리가 방문한 날엔 산신제를 접하기엔
한참 지난 날이긴 했지만, 이 날에도
산신께 기도를 올리고 있어서 조심스럽게
예만 갖추고 사진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다람쥐 한 마리가 겁도 없이 제물로 올려진
밤과 대추를 집어들어 먹고는 유유히 사라진다.

차려놓은 제상을 건드려도 가만히 놔두는
무당도, 밤과 대추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집어든 다람쥐도, 그것을 다 품고 있는 산신도,
모두가 내 마음에 어우러져 참다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래 우리 문화는 이런 것이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문화.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되는 문화.
그것이 홍익이란 꽃으로 피어난 문화.



칠성당과 용왕당

이 날은 이 곳 어딜가도 굿과 기도가 한창이다.
산신당에 있던 그 다람쥐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도 다람쥐 손님이 와 있다.
다른 곳도 아닌 칠성님과 용왕님께 기도하는
곳이니 자연의 손님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겉으로 보이기엔 그냥 돌무더기이고
흐르는 물이지만, 칠성당과 용왕당으로
이름된 이후로 이 곳을 찾은 수많은 이들의
굽이 굽이 아리랑 고개를 넘나든 사연들을
품었을 곳이기에 굳이 의미를 따진다면
국보급 문화재 보다 더한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
우리와 너무 가까워서 그 가치를 귀하게
인정받지 못하는 우리 부모와 같은 곳!
하루 빨리 우리들 대부분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헤아릴줄 아는 사람다운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성산면 어흘리 서낭당숲

대관령 국사성황당을 뒤로하고 강릉시에 있는
국사여성황당으로 향하는 길에 서낭당으로
보이는 건물이 보이기에 길을 멈춘다.
사전 조사에 따르면 강릉에 이 곳과 같이
잘 조성되어진 서낭당이 100여곳 가까이
된다고하니 단오제를 제대로 치룰 환경이
충분한 도시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사진자료를 남기고 돌아서 나오는데
당숲 끝머리에 뽕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당숲 옆으로 흐르는 개울가에서 다슬기를
잡고 있는 가족을 보고있자니
우리도 잠시 쉬어갈겸 오디 열매를
몇 개 따먹어 보니 유난히 달고 맛있다.
음~ 맛나다.



성산면 구산리 서낭당

성산면 어흘리 서낭당숲을 뒤로하고
얼마가지 않아 또 서낭당이 눈이 띈다.
음력 4월 보름날 대관령산신제와
국사성황제를 올리고 신목잡이가
신목(神木)을 베면 사람들은 신목에
청홍색의 예단을 걸어 국사성황의
행차를 준비한다. 국사성황 행차는
대관령 아흔아홉 굽이를 내려와
구산에서 구산서낭제를 받는다고하는데,
그 구산서낭제를 올리는 곳이 바로
이 곳이 아닌가 싶다.


대관령 국사여성황당

아 드디어 찾았다.
본의가 아니게 정말 찾기 힘든 곳이 되어 버렸다.
국사여성황당 위치를 명확하게 아는 강릉사람들을
만나지 못해선지 길을 묻는 사람들마다
어렵풋이 아는 이들이라 더더욱 길을 헤메고 다녔다.
어떤이는 없어졌다는 사람도 있었고,
묻는 사람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더 이해가 가질 않는 부분은 단오제 행사장을
안내하는 관공서 공무원들에게 물어보아도
알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시에서 해마다 이같이 큰 행사를 거행하면서
시의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행사에
의미가 크게 부여된 장소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본인 일이 아니란다
장소를 안내하는 일이 본인의 주된 업무건
아니건 간에 강릉단오제를 치루는
강릉시의 공무원이라면 당연히 알고있어야 할
사항이 아닌가 말이다.
그것도 멀리 떨어져 있는 시설물도 아니고
버스로 두 세코스만 가면 되는 곳인데도
모르고 있다.

천신만고 끝에 북적이는 남대천 행사장에서
조금 벗어나 한적한 주택가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방문하여 보니 그 곳을 지키고 계시는
아주머니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원래는 이 곳을 중심으로 모든 제반되는 행사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성황당과 뚝 떨어진 곳에서 저러고 있다고 서운함을 털어 놓는다.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에 장소가 협소해서인가,
어떤 이유야 있겠지만 이 곳에서 제를 올리고
남대천가에 자리한 행사장에 따로 제당을
따로 설치해서 그 곳을 중심으로 행사가
치뤄진다고 한다.
찾을 때 부터 어렵게 찾은데다가 중요한
부분이 어그러져서 이루어진다고 하니
아무리 행사를 뻑쩍지근하게 치른다고 한들
신명이 날리가 있겠는가.
나 부터도 행사가 재미없어지는걸....

강릉단오제 행사장

대관령여성황당을 뒤로하고 행사장 쪽으로
향하여 보니, 남대천 양쪽 강가를 따라
행사장이 조성되어 있다.
연신 무당이 굿하는 소리가 울려퍼져
여기가 강릉단오제 행사장임을 알게한다.

한쪽에선 장이 열렸는데
모두 이불을 팔고 있다.
덕분에 이불 구경은 실컷한듯 하다.
행사장에는 강릉단오제를 구경온
외국인들도 눈에 띈다.
그런데 얼굴 표정이 즐거워 보이는
표정은 아니다.
강릉단오제를 보러온 외국인의 표정을
살피는 내가 참 우스워보인다.
당당하게 우리나라 문화가 이렇게 조화로운
문화라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고 올곧게
나누지 못하는 것에 대한 서운함이 겹친
씁쓸함이라 해야 할까.

추후 이루어지는 단오제는 전통을 제현하는
정도의 행사가 아닌 명실상부한 단오제,
단오제 본연의 의미가 잘 표현된 단오제,
누구나 다 풍요와 안정을 기원하고
신명나게 즐길 수 있는 올곧은 단오축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 가져본다.



참고로 강릉단오제에 대한 네이버 지식백과 자료를 퍼올립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강릉단오제
[ 江陵端午祭 ]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 대관령서낭을 제사하며, 산로 안전(山路安全)과 풍작·풍어, 집안의 태평 등을 기원하는 제의이자 축제라고 할 수 있다. 단오굿·단양제(端陽祭)라고도 불리며, 단오날 행사로서는 가장 대표적인 행사이다.

음력 3월 20일부터 제사에 소용될 신주(神酒)를 빚는 데서 시작하여 단오 다음날인 5월 6일의 소제(燒祭)까지 약 50여 일이 걸리는 대대적인 행사이다. 단오제의 제사일정은 다음과 같다. 3월 20일 제사에 쓸 술을 담그고, 4월 1일을 초 단오(初端午), 4월 8일을 재 단오(再端午) 또는 2단오라 하여 헌주(獻酒)와 무악(巫樂)이 있다.

4월 14일은 서낭신을 모시기 위하여 강릉을 출발하여 송정(松亭)에서 야숙하고, 4월 15일 3단오날에는 대관령서낭과 산신께 제사하고 신목(神木)과 서낭을 모시고 돌아온다. 이때에 강릉사람들이 구산(邱山)서낭당까지 마중을 나와 횃불을 밝히고 함께 여서낭당에 와서 서낭내외를 합사(合祀:둘 이상의 혼령을 한 곳에 모아 제사함)시킨다.

4월 27은 4단오로 무당들에 의해서 굿이 행해진다. 5월 1일 5단오날은 본제가 시작되는 날로, 화개(花蓋)를 모시고 굿당으로 가서 굿과 관노가면극(官奴假面劇)을 행한다. 5월 4일은 6단오, 5일은 7단오로 무굿과 가면극이 있으며, 단오날을 본제날로 여기고 있다. 5월 6일은 8단오로 서낭신을 대관령국사서낭당으로 봉송하는 소제를 끝으로 약 50일 동안의 단오제는 막을 내린다.

본격적인 제의와 놀이는 5월 1일부터 시작되는데, 단오굿과 관노가면극을 중심으로 한 그네·씨름·줄다리기·윷놀이·궁도 등의 민속놀이와 각종 기념행사가 벌어진다. 이때 영동일대와 각지에서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드는데, 예나 다름없이 지금도 대성황을 이루어 강릉시가는 일년 중 가장 혼잡을 이룬다.

강릉단오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그 역사와 예전 모습을 짐작하게 해주는 단편적인 기록이 전하고 있다. 조선 초기의 문인 남효온(南孝溫)의 문집인 <추강냉화 秋江冷話>(1477)에 의하면 영동민속에 매년 3·4·5월 중에 택일을 하여 무당들이 산신을 제사하는데, 3일 동안 큰 굿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추강냉화>의 기록은 반드시 단오제를 지칭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 시기 중 5월이 포함되어 있고, 또 그 의식이 대관령서낭제의 진행과 비슷한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강릉단오제로 추정하게 한다. 또한,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 惺所覆瓿藁>(1611)에도 그가 1603년(선조 36)에 강릉에 가서 단오제를 구경하였다는 내용과 함께 대관령산신이 김유신(金庾信)이라는 이속(吏屬 : 관아에 딸린 구슬아치)의 말을 인용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에도 단오제가 거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기록으로 강릉의 옛날 향토지인 <임영지 臨瀛誌>를 취사(取舊)해서 경종 때 간행한 <강릉지 江陵誌> 권2 풍속 조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견훤(甄萱)의 아들 신검(神劍)을 정벌하기 위해서 남정(南征)하였을 때 꿈에 중과 속인 두 신[僧俗二神]이 병졸을 이끌고 와서 구해주었다. 꿈이 깨어서 싸웠는데 이기게 되어 대관령산신에게 제사하고 치제(致祭)하기에 이르렀다 한다.

이로 보건대 대관령산신은 10세기에 이미 있었으며 당시에 왕이 제사한 것으로 보아 큰 신제(神祭)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런데 허균의 <성소부부고>나 현지주민의 이야기에 따르면, 대관령산신은 김유신이며 서낭신과는 별개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김유신이 명주(溟州 : 지금의 강릉)에 유학한 일이 있고 대관령산신에게서 검술을 배웠으며 죽어서 산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나 <임영지>의 ‘승속이신’ 등의 내용을 보면, 대관령산신은 김유신 하나가 아니고 그 이상일 수 있다는 가능성도 없지 않다. 다만, 대관령산신으로 중요하게 간주되는 것은 김유신이다. 이에 대하여 ‘승(僧)’은 국사 범일(梵日)이고 ‘속(俗)’은 김유신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한편, 강릉단오제의 유래를 알려주는 것으로, 단오제의 주신(主神)으로 모시는 대관령국사서낭[大關嶺國師城隍]과 그 부인인 대관령국사여서낭[大關嶺國師女城隍]에 대한 구전설화가 있다. 대관령국사서낭은 범일 국사가 죽어서 된 것이고, 대관령국사여서낭은 국사서낭과 혼배(魂配)한 정씨녀(鄭氏女)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대관령국사서낭설화 : 옛날 학산리(鶴山里:지금의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마을에 한 처녀가 굴산사(屈山寺) 앞에 있는 석천(石泉)에 가서 바가지로 물을 뜨니 물 속에 해가 떠 있었다. 물을 버리고 다시 떴으나 여전히 해가 있으므로 이상하게 여기면서 물을 마셨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 처녀에게 태기가 있어 마침내 아이를 낳았는데 아비 없는 자식이라 하여 마을 뒷산 학바위 밑에 버렸다.

산모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이튿날 그곳에 다시 가보니 뜻밖에도 학과 산짐승들이 모여 젖을 먹이고 날개로 가려 따뜻하게 해주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비범한 인물이 될 것이라 믿고 아이를 데려와 키웠다. 아이가 자라자 당시의 서울인 경주로 보내어 공부시켰는데 나중에 국사가 되었다. 해가 뜬 물을 마시고 태어났다고 하여 ‘범일국사(泛日國師)’라 부르게 되었다.

범일 국사는 학산에 돌아와 자기의 지팡이를 던져 꽂힌 곳에 절을 지어 심복사(尋福寺)라 하였다. 범일 국사는 강릉에 살았는데, 때마침 난리가 나서 대관령에서 술법을 써서 적을 격퇴시켰다. 불법을 전파시키고 고향을 지킨 그는 죽어서 대관령의 서낭신이 되었다고 한다.

② 대관령국사여서낭설화 : 옛날 강릉에 정씨가 살았는데, 나이 찬 딸이 있었다. 하루는 꿈에 대관령서낭신이 나타나 장가오겠다고 청하여 왔으나 정씨는 서낭신에게 딸을 줄 수가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정씨 집 딸이 곱게 단장하고 마루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업고 달아났다. 처녀를 업고 간 호랑이는 산신이 보낸 사자였으며, 서낭신은 처녀를 데려다가 아내로 삼았다.

딸을 잃은 정씨 집에서는 야단이 났고 대관령서낭당에 찾아가 보니 처녀는 서낭과 함께 서 있는데, 이미 죽어서 혼은 없고 몸만 비석처럼 서 있었다. 정씨는 하는 수 없이 화공을 불러 딸의 화상을 그려 붙이니 처녀의 몸이 비로소 떨어졌다. 호랑이가 처녀를 업어가서 대관령서낭과 혼배(혼인)한 날이 4월 15일이므로, 지금도 4월 15일에 두 신을 함께 모셔 제사지낸다.

이 두 전설은 서로 연관성이 있는데, 강릉단오제가 대관령서낭을 제사하는 굿이며 그 주신인 서낭은 비범한 탄생을 가진 국사 범일이고 대관령서낭신이 부부신이라는 것을 설명한 것으로, 이 두 사람을 함께 제사지내는 데서 강릉의 단오제는 시작되었다고 한다.

또한, 앞의 문헌기록과 함께 범일이 통일신라 말인 9세기 사람이고, 민족항일기까지 대관령국사서낭신을 모셔 단오제를 지냈던 큰서낭당(현재는 없음)에 모신 12신위 중 신라시대 인물이 많은 점으로 보아 이 단오제는 적어도 9세기 이전에 기원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단오제가 다가오면 제관을 선정하고 제물을 마련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준비와 정성이 따르는데, 현재는 강릉단오제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어서 단오제와 이에 수반되는 일체의 대회운영을 맡고 있다. 제관으로 초헌관(初獻官)은 강릉시장, 아헌관(亞獻官)은 명주군수(현재는 강릉시의회의장), 종헌관(終獻官)은 경찰서장이 관례적으로 담당한다.

그리고 따로 제물을 장만하는 도가(都家)가 있다. 제비(祭費)는 위토(位土:수확을 亨祀 등 일정한 목적에 쓰기 위하여 장만한 논과 밭)가 있어 여기에서 얻은 소출(所出)로 충당하지만 워낙 규모가 큰 굿이기 때문에 기부금과 걸립(乞粒)에서 얻은 전곡(錢穀)으로 충당한다. 걸립 때 각 가정에서는 자진해서 곡식이나 돈을 성의껏 내어놓아 대관령서낭에 대한 신앙심을 보여준다.

제물은 제한을 받지 않으며, 메·탕·술·과일·쇠고기·어물 등으로 소박한 편이다. 제일(祭日) 며칠 전부터 제사에 직접 관여하는 제관·임원·무격(巫覡) 등은 부정(上淨)이 없도록 새벽에 목욕재계하고, 언행을 함부로 하지 않으며, 제사가 끝날 때까지 먼 곳 출입을 삼가고 근신하는 등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다. 마을사람들도 근신해서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않고, 부정한 것을 보거나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다.

그리고 제사를 지낼 신당(神堂)과 우물·도가 등에는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쳐서 부정을 막는다. 제물을 다루는 사람은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 입에 밤이나 백지조각을 문다. 말을 하면 침이 튀어 음식에 들어갈 수도 있고, 또 부정한 말을 주고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금기(禁忌)는 여러 가지이고 엄격하였다.

금기를 깨면 개인은 벌을 받고, 임원·제관·무격이 금기를 어기면 제사를 지내도 효험이 없으며 오히려 서낭의 노여움을 사서 재앙이 있다는 것이다. 제사일정과 진행과정은 다음과 같다.

③ 음력 3월 20일 : 단오제에 사용할 술(일명 조라)을 담근다. 관에서 급여한 쌀이나 제전(祭田)에서 농사를 지은 정(淨)한 쌀 한 말과 누룩을 섞어서, 옛날에는 호장(戶長)·부사(府使)·수노(首奴)·서낭맹[城隍盲:남자 首巫覡]·내무녀(內巫女)가 목욕재계하고 술단지를 봉해서 호장청의 하방(下房)에 둔다. 근래에는 도가가 제물을 준비하므로 도가의 집에서 준비한다. 이를 ‘신주근양(神酒謹釀)’이라고 한다.

④ 4월 1일 : 초 단오(初端午)라고 하는데, 이날부터 계산해서 7일 만에 단오가 한번씩 들고, 5월 1일에 5단오가 되면 다음은 3일 뒤인 5월 4일이 6단오, 5월 5일은 7단오, 5월 6일은 8단오라고 한다. 초 단오날에는 사시(巳時)에 큰서낭당에 헌주하고 무악을 연주한다. 초헌은 호장, 아헌은 부사, 삼헌은 수노, 종헌은 서낭지기가 했다. 헌주가 끝나면 무격들이 <산유가 山遊歌>를 부르고 굿을 한다. 관노들은 <태평가>를 부르는데, 오후 미시(未時)에 끝난다.

⑤ 4월 8일 : 2단오에 해당하며 불탄일(佛誕日)이다. 초 단오와 마찬가지로 큰서낭당에서 헌주하고 굿을 한다.

⑥ 4월 14일 : 저녁을 먹고 대관령서낭을 모시러 대관령으로 출발한다. 행렬의 선두에는 16명의 악공(樂工)들이 연주를 하고 호장·부사·수노·도사령과 남녀무격 50∼60명이 따르는데, 옛날에는 모두 말을 탔으며 수백 명의 마을사람들이 뒤를 따라 장관을 이루었다 한다. 행렬이 구산에 도착하면 마을사람들이 밤참을 준비하였다가 일행을 대접한다. 산중턱 송정(松亭)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조반을 지어먹은 다음 닭이 울면 길을 떠나 국사서낭당에 도착한다.

⑦ 4월 15일 : 국사서낭과 서낭당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대관령산신당의 산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때 바로 옆에 있는 칠성당과 우물에서 용왕굿을 한다. 소지(燒紙)를 마지막으로 제사가 끝나면 음복을 하고 가지고 간 물건은 모두 버린다. 서낭당 근처에서 무녀가 굿을 하고 빌면 많은 나무 가운데에서 한 나무가 신들린 것처럼 흔들리는데, 그 나무를 신칼로 베어 신간목(神竿木)으로 삼아 제사가 끝날 때까지 제당 안에 세워둔다.

제사가 끝난 다음 신간목을 앞세우고 하산하는데, 구산 쯤에 이르면 저녁때가 되므로 강릉에서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마중을 나온다. 일행은 국사서낭부인의 생가에 잠시 들른 다음 여서낭당에 가서 서낭내외를 합사한다.

⑧ 4월 27일: 4단오날로 무당들에 의해서 굿이 거행된다.

⑨ 5월 1일: 5단오날로 화개(花蓋)를 만들고 관노들에 의하여 탈놀이가 시작된다. 이날부터 단오굿이 본격적으로 행해지는데, 5일인 단오날까지 굿당에서 매일 무당들의 굿과 관노의 탈놀이가 계속된다. 화개는 ‘○대’라 부르기도 하는데 부사청(府司廳)에서 만들었다. 대나무를 직경 6척(1.8m) 정도로 둥글게 하고 여기에 나무껍질을 감아 무겁고 튼튼하게 해서 30척(9m)쯤 되는 장대 위에 세워 수레바퀴를 달아맨 것처럼 만든다. 여기에 20척(6m)쯤 되는 오색 천을 늘어뜨리고 장대도 오색 천으로 감아 곱게 만든다. 화개의 무게는 4, 5관(15∼20㎏)이 되므로 여간한 장사가 아니면 들 수 없다.

⑩ 5월 5일 : 단오날은 대제(大祭)의 날이다. 대관령에서 국사서낭을 모실 때처럼 악대·임원·무격·마을사람들의 행렬이 있다. 옛날에는 화개를 앞세우고 큰서낭당을 출발해서 약국서낭[藥局城隍]·소서낭[素城隍]을 거쳐 시장·전세청(田稅廳)·대동청(大同廳)·사창청(司倉廳)에서 굿을 하고 화개는 여서낭당에, 신간은 큰서낭당에 봉안했다. 단오날에는 사당주변에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쳐서 부정을 제거한다.

⑪ 5월 6일 : 큰서낭당의 뒤뜰에서 소제가 있다. 단오제를 위해서 만든 신간과 화개를 비롯하여 모든 것을 불에 태우는 의식이다. 그 동안 여서낭당에 모셨던 국사서낭을 대관령의 국사서낭당으로 다시 모셔 가는 봉송(奉送)을 마치면 근 50일에 걸쳐 있었던 단오제가 모두 끝나게 된다. 대관령에서 국사서낭을 모셔다가 여서낭당에 모신 다음날인 4월 16일부터 5월 6일 제사가 끝날 때까지 21일 동안 날마다 새벽에 호장·부사·수노·서낭지기·무녀는 국사서낭에게 문안을 드리며, 주민들은 직접 큰서낭에 가서 치성을 드리거나 단골무당을 시켜 치성을 드리고 소원을 빈다. 상업을 하는 사람들은 사업번창을 빌고, 농가에서는 풍년이 들기를 빌며, 어부들은 만선해서 풍어를 이루기를 빈다.

일반적으로는 가내안정과 질병 없이 건강하며, 또 대관령을 자주 왕래하는 사람들은 산로(山路)의 안전을 빌었다. 원래는 큰서낭당에서 주로 행사하였지만 도시 발전에 따라 큰서낭당 자리에 측후소가 들어앉게 되어 서낭당이 없어졌으므로 근래에는 남대천(南大川)의 넓은 백사장에 임시로 제당을 가설하고 여기에서 굿과 탈놀이를 하고 있다. 그래서 단오제 때가 되면 수만 명의 군중들이 모여들므로 장터처럼 혼잡하고 강변일대에는 난장이 벌어지기도 한다.

강릉단오제는 제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유교식 의례와 무격에 의하여 거행되는 굿이 복합되어 있다. 그러나 단오제를 ‘단오굿’이라고 부를 만큼 무당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굿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고, 또 그 핵심이 되고 있다.

특히 단오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5월 1일부터 5월 5일까지는 무당굿이 한창이다. 굿거리는 열두거리로 행해졌다고 하나 굿의 거리 수나 순서는 경우에 따라 다소 달라지기도 한다. 근래에는 15∼19거리로 행해지는데, 그 절차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부정굿 : 굿의 맨 처음에 행하는 거리로 본거리에 들어가 모든 신을 맞이하기 전에 불결하고 부정한 것을 정화시켜 제장을 깨끗이 하는 굿이다. 무당이 무가를 부르고 신칼로 바가지의 물을 찊어 제장 주변에 뿌린다.

②축원굿 : 합사한 서낭내외를 5월 3일 단오장(남대천 가설서낭당)에 모시는 거리로, 대관령국사서낭을 4월 15일 대관령에 모시러 간 데서부터 여성황사·정씨가지(鄭氏家址, 현 최씨댁)에 모신 경위를 가창하여, 서낭내외가 화합하고 재수와 복을 베풀어달라는 축원을 한다.

③ 조상굿 : 조상신을 위하는 거리로, 아기조상이든 어른조상이든 조상신을 청하여 재수를 빌고 자손을 잘 돌보아달라고 축원한다.

④ 세존굿(당고마기) : ‘시준굿’ 또는 ‘중굿’이라고도 하는데, 자손의 번성과 복을 가져다주는 삼신 ‘당고마기(당금아기)’를 위하는 굿거리이다. 무녀는 고깔을 쓰고 염주를 걸고 장삼을 입고 나와 장편 서사무가(敍事巫歌)인 <당고마기노래>를 부른다.

⑤ 성주굿 : 집을 관장하는 성주신을 모시는 거리로 <성주풀이>를 가창한다. 무녀가 쾌자를 입고 갓을 쓰고 부채를 들고 나와 집을 짓는 과정, 세간을 장만하고 집치장을 해나가는 모습 등을 무가를 통하여 묘사한다. 팔도민요들이 중간에 삽입되고 유흥성이 고조된다.

⑥ 군웅굿 : 군웅은 무신(武神)으로,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액을 막아준다. 김유신을 비롯하여 중국의 조자룡·제갈량 등 뭇 장수와 오방신장 등을 청배무가(請陪巫歌)로써 모셔 강릉의 안녕함과 질서를 기원한 뒤 놋대야를 입에 무는 행위를 함으로써 장수의 위엄과 영력(영적인 힘)을 보여준다. 또한 가축의 번식을 빌기도 한다.

⑦ 심청굿 : 인간의 눈병을 막아주고 눈이 밝아지기를 기원하는 거리로 <심청전>의 내용과 같은 서사무가가 장시간 구연된다.

⑧ 칠성굿 :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신을 위하는 거리이다.

⑨ 지신굿 : 지신(地神)을 모시는 굿으로 자손과 가업이 번창할 것을 기원한다.

⑩ 손님굿 : 손님이라는 두신(痘神)에게 마마를 예방하고 건강을 비는 굿거리이다.

⑪ 제면굿(계면굿) : 무당신인 ‘제면할머니’에 대한 굿으로 무조(巫祖)의 내력을 밝히는 서사무가가 구연된다. 단골들을 위한 굿이며 골계적인 내용이 많다.

꽃노래굿: 여러 명의 무녀들이 제사상을 장식하였던 지화(紙花)를 들고 나와 윤무(輪舞)하며 온갖 꽃을 찬양하는 꽃노래를 부른다.

⑫ 등노래굿 : 제장에 달아놓은 큰 호개등을 떼어내려 이것을 무녀 여러 명이 들고 돌리면서 등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⑬ 대맞이굿 : 5일간 단오장에 모셨던 국사서낭을 환송하는 거리로, 대관령에서 내려와 있는 동안 정성을 잘 받으셨는지 신의(神意)를 묻고 응답을 받아서 안도와 번영을 스스로 굳혀나가자는 의도에서 이루어진다. 서낭대를 앞으로 모셔내고 제관은 위패를 들고 국사서낭님이 오셔서 그간 반가이 맞으시고 즐거이 보셨는지 물으면 대가 흔들린다. 그러면 내년 이맘때까지 바람을 타고 구름을 타고 대관령 아흔 아홉 굽이 올라가시라고 하고 자손들의 부귀공명과 태평함을 축원한다.

⑭ 환우굿 : 맨 마지막 제차로 국사서낭신이 단오장에서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의식이다. 대관령에 올라가 깨끗한 장소를 골라 단오제에 사용된 신간·꽃·호개등·위패 등 모든 것을 불태우는데, 불이 다 탈 때까지 제관·무녀·일반인 등은 불길을 향하여 계속 절을 한다. 근래는 남대천 단오장 주변에서 한다.

이러한 15거리 외에 화해굿·청좌굿·산신굿(산신령굿)·용신굿 등이 첨가되기도 한다. 국사서낭당과 여국사서낭당에서의 굿은 부정굿·청좌굿·화해굿·축원굿의 제차만을 행한다. 단오제의 굿은 원래는 대대적인 것이었으나 근래에는 체육대회·궁술대회·씨름대회·민요경연대회·농악대회·백일장 등의 행사에 치중되어 경비가 많이 드는 무당들의 굿은 규모가 축소되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강릉단오제는 고대 부족국가의 제천의식 또는 부락제(동제)의 잔형으로 해석되며, 우리 나라의 향토신제 중 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규모나 축제의 분위기는 시장의 경기 부흥책으로 벌이던 난장굿의 성격을 띠고 있어 일종의 대형화된 별신굿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은산별신제나 동해안별신굿, 그밖에 부락제와 비교해볼 때 강릉단오제는 그 절차나 진행이 돋보이고 문화적 의의가 두드러진다. 그 의의는 첫째, 종교적 측면으로서 향토신앙을 통하여 전 주민(시민)이 화합하는 대동단결의 힘이 구현된다는 데 있다.

이러한 협동정신은 향토의식과 애향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또한 전 주민이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함께 참여하여 즐김으로써 진정한 축제의 구실을 한다. 둘째, 나날이 쇠퇴해 가는 전통문화의 현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전통문화의 가치가 보존적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고 현재와 더불어 생동하는 박진감에 있는 것인데, 이에 적절한 예가 강릉단오제이다. 셋째, 강릉단오제가 제시해준 문화의 복합양상과 그 창조적 계승방향이다. 유교·불교·무속의 복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있고, 그 구현이 시대의 상이(相異)에도 불구하고 적절히 계승되었다. 그밖에도 이 행사가 관 주도형에서 탈피하여 민간주도형으로 행하여지고 있다는 점에서 전시 위주의 행사가 아닌 향토주민들의 생활 속의 문화가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으며, 기·예능보유자로 김신묵(金信默 : 제관·도가)·김동하(金東夏:관노가면극)·차형원(車亨元 : 관노가면극)·장재인(張在仁:무녀)이 인정되었으나 사망하였고, 그 뒤 1976년 박용녀(朴龍女:무가), 1989년 신석남(申石南:무가), 1993년 권영하(權寧夏:관노가면극)가 인정되었으나 사망하였다. 현재 기예능 보유자로는 김진덕(金振悳 : 제관·도가, 1982년 인정)만 남아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추강냉화(秋江冷話)』
『성소부부고』
『강릉지』
『임영지(臨瀛誌)』
『중요무형문화재지정자료』-강릉단오제-(임동권, 문화재관리국, 1966)
『한국시가의 민속학적연구』(김선풍, 형설출판사, 1977)
『중요무형문화재해설』-놀이와 의식편-(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85)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대관령 국사성황당 가는 길
(구)영동고속도로 대관령휴게소 건너편 양떼목장 올라가는 길 옆에 "대관령국사성황당"이라고 쓰여진 입석이 있다. 약 700M 산길을 오르면 좌측으로 국사성황당, 우측 조금 뒤에 산신당 또 그 뒷쪽에 칠성당과 용왕당이 자리하고 있다.

대관령 국사여성황당 가는 길
강릉시 홍제동 동사무소 옆 언덕길로 약500M 가면 우측으로 여성황당 입구라고 쓰여진 좁은 골목길로 올라가면 성황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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